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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의졸업생

관계

 

성명 우학종 (송도고등보통학교)

직업 개성소년형무소장

졸업회수 7회

졸업연도 1926년

남기는 글

[경기일보] 현충일, 당신의 애국정신이 그립습니다 - 2013.06.05

[경기일보] [기고] 알려지지 않은 순국 교정공무원 - 2016.06.15

국가의 존망이 걸린 전시업무를 수행하며 호국의 초석이 된 이들을 우리는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세상 사람이 아는 위대한 승리에 관한 영웅이야기는 아니지만 6ㆍ25 전쟁 당시 나라를 위한 희생정신과 리더십을 보여준 순국 교정인 故 우학종 개성소년형무소장의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우학종(1905~1950) 소장은 1926년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7년 형무관으로 임용돼 6ㆍ25 전쟁 발발 당시 개성소년형무소장으로 재직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38선 이남으로 불과 1km 거리에 위치한 개성소년형무소에 요란한 총성이 울려 퍼진다. 잠에서 깬 우 소장은 위급한 사태를 직감하고 전 직원을 비상소집했으나 직원들이 도착할 틈도 없이 북한군에 포위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우 소장은 비상소집에 응소한 30여 명의 교도관과 함께 열악한 화력(99식 소총, 칼빈 소총)과 인원에도 불구하고 형무소를 지키기 위해 인민군과 맞서 싸웠으나 강력한 집중포화로 희생자가 점점 늘고 우 소장의 부인까지 북한군의 인질로 잡혀 살해 협박을 받는 등 형무소 내는 절망감이 감돌았다.

더 이상 가망이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우 소장은 전 직원을 모아놓고 “우리는 형무소 사수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훗날 책임 추궁이 있거든 모두 소장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말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총으로 자결함으로써 장렬한 최후를 마쳤고, 10시간의 항전 끝에 형무소는 함락되고 말았다.

오늘날 우리가 자유와 번영 속에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은 한국전쟁 당시 조국을 지키기 위해 총 한 자루로 적과 맞서 싸웠던 이름 없는 호국영령들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들의 희생은 이름도 없이 무심한 세월의 흐름 속에 잊혀 가고 있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6ㆍ25 전쟁에 참전했지만 아직 국가유공자로 등록되지 않은 참전용사들이 2013년 기준으로 90만 명 중 42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제61회 현충일을 맞아 내건 ‘국가와 국민을 위한 희생,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슬로건은 미등록된 42만의 참전용사와 후손들에게 너무나 죄스럽고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문구가 아닐 수 없다.

6월 한 달이 지나면 그들의 희생은 다시 1년을 기다려 회고되겠지만 ‘역사를 잊은 민족은 살아남을 수 없다’는 교훈을, ‘보훈정신을 잊지 않는 국민만이 새로운 시대가 주는 자유와 행복을 만끽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재영 서울구치소 총무과 교사
 

졸업생 이미지

성명 김경집

직업 인천대 송도캠퍼스 사무처장

졸업회수 56회

졸업연도 1976년

남기는 글

[인천일보] 인천주권시대, 현업중심 교육실천 추구

http://www.incheonilbo.com/?mod=news&act=articleView&idxno=738918

<송도 110년사 기념책자 발췌>

졸업생 이미지

성명 박술음 (송도고등보통학교)

직업 영문학자, 사회부장관, 한국외대학장

졸업회수 2회

졸업연도 1919년

주요경력

 학력
   1924  연희전문학교  문과졸업
   1964  연세대학교  명예문학박사
  경력
1937.  ~   .    영어교원 검정고시 합격
1945.  ~ 1948.    휘문중학교 교장
1947.  ~   .    연세대 교수.교무처장
1952.10 ~ 1955.02   제5대 사회부 장관
1955.  ~   .    한국외국어대 교수.대학원장
1966.  ~ 1977.    한국외국어대 학장
1977.  ~ 1983.    연세대 명예교수
1977.  ~ 1983.    을유문화사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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